이제 앞으로 우리나라는 이미 국제무대에 나서서 활약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로 구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창출해나가야 될 것이다.
또한 삶의 본질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가에 대해 정밀한 연구와 과거의 모든 문제의 매듭을 풀어 새롭게 정리해 나가야 한다.
지금의 세계정세는 상당한 변화를 겪어나가고 있어 이념이나 사상 같은 것들의 흐름이 물꼬를 달리 하고 있음을 또한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패배했다는 말이 옳은지 아닌지는 아직 우리는 모르는 일이며 좀 더 두고 볼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전개될 상황을 점쳐보려면 그 원인을 철저하게 연구해보고 옥석을 가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수명을 다했을 때 비로소 성장을 목표로 발기하는 것이 수순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던 것이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서둘렀고 과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제 풀에 쓰러져 버렸기 때문인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씨마저 없어져 사라졌을 때, 또 자본주의가 망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될 것인가.
자본주의의 말로(末路)는 그야말로 인간성의 핍박과 황패해진 인정의 궁핍으로 살맛이 없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돈이 많고 적은 것과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돈이 많을수록 행복의 지수는 낮아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함이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은 물질만능, 황금만능주의를 외치면서 거침없이 살아온 결과를 우리는 보고 있음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제 그 마지막의 비참하고 참담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는 일제의 압제 하에서 또는 6.25의 전쟁을 겪으면서 물자의 궁핍을 느끼며 배고파 못살겠다는 시절을 지냈다. 다시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농경사회란 배고픈 시절이었고 의, 식, 주에 대하여 항상 갈급함을 느끼게 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물자를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도록 일을 해야 하는 시대였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말하자면 산업시대로 가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왔다.
그러나 산업시대에 들어서서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또 힘이 들고 고달프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한 쪽에서 힘들어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나오고 점점 공장에서 또한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고 3. D 기피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지를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시대의 조류는 급류를 타고 벌써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지금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지금은 아마 정보화시대로 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문제가 없는가? 아무리 사회복지제도가 잘되어 있고, 국가에서 편안하게 모셔줄 양로원, 고아원,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편의시설을 제공해 준다 해도 다른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요즈음은 뜻밖에도 외로워서 못살겠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지를 않은가. 미국의 어딘지 생활은 물론 의료, 스포츠 등의 시설이 초현대식으로 잘 되어 있는 실버타운(고급 양로원)에서 노인들이‘외로워서 못 살겠다!’라는 플랜 카드를 들고 데모를 했다는 것을 보도에서 본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의외는 아닌 것 같다. 노인문제가 심각하고 또 청소년들의 자살 유행이 벌써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적이 벌써 오래인 것이다. 노인은 노인대로 아이들은 나름대로 외롭고 고독한 것을 못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가족들이 위계질서를 지키면서 오손 도손 모여 사는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핵가족 시대로 옮아가면서 노인은 설 땅이 없고, 아이들은 이혼율이 급등하면서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거나 컴퓨터와 친구를 하면서 이미 인간사회의 정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해왔고, 물자를 조달하여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얻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해 오면서 가족들이 서로 갈라져서 각자 여념 없이 지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배고픈 것도 그리고 물자의 궁핍도 느끼지 않으면서 못살겠다는 말이 나온다. 그것을 살펴보면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더러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못살아도 그리고 힘들고 어려워도 오손 도손 서로 정을 나누면서 사는 아기자기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 사는 보람이고 가치이고 또 생활의 윤활유가 되는 윤택한 삶이라는 것을 현대의 사람들이 비로소 깨우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21세기는 두뇌산업의 경쟁이라 하여 지능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필히 그 다음에 오는 시대는 감성지수가 지배하는 인간성 회복시대가 도래할 것임 분명해진다. 문화의 관광시대가 승패를 가름할 시대가 올 것이란 말이다. 어차피 우리는 자원이 부족하고 지형여건이 불리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가 행여 낙오되지 않을까 대단히 염려스럽다.
부부가 금슬이 좋고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따뜻한 가정에서 명랑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국가가 부강(富强)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세계 즉 지구촌의 부러움을 사고 그들에게 귀감이 되며 선진국이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서는 앞으로 정신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또 부흥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는 까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까치는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밑에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까치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하늘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여 자기도 하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더욱 열심히 찾아보려고 하였다. 또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뭘 그리 열심히 바라보나 하고 호기심에 자기도 하늘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잘 모르는 것이다. 더욱 호기심만 커지고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마음뿐이다.
또 지나가는 사람이 여러 사람들이 무언가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는 역시 같은 방향을 향해서 무언가를 찾아보고 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별로 특별한 것이 보이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필시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였다. 그리고 모두 같은 방향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까치는 날아가 버리고 없지만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빈 하늘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이기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이 옆 사람에게 물었다.
‘하늘에 무엇이 있습니까?’옆 사람이 대답한다.‘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얼떨떨하여‘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 역시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왜 그 사람들은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무언가를 애쓰게 찾으려고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섣불리 물어보는 것이 왠지 창피한 기분이 들어서 냉큼 물어보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만이 모르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그 의문을 스스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알 길이 없어 그냥 그렇게 군중들을 따라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까치를 보았던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어디론지 가버리고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원인을 밝힐 사람이 없는 셈이다.
그리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각자 억측과 상상으로 하늘에 무엇이 있었다고 예상을 하기도 하고, 또는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 내어 정말로 그런 가상적인 것이 실상인 것처럼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만들기도 한다.
지난해에 2000년이 밝아오를 무렵, 사람들은 온갖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생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새천년에는 밀레니엄시대로 신천지가 전개될 것처럼 사람들은 떠들어대면서 여러 사람들을 호도하고 현혹시키기도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갈 거라고 믿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로 빠지는 것 같았다.
말세론이 등장하기도 하고, Y2K가 등장하고, 기독교의 구약시대에서 신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대의 도래, 그리고 불교의 미륵하생의 지상천국을 꿈꾸게 하는 새로운 미래가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부풀었다. 고로 야단법석으로 저마다 오도 방정을 떨더니 벌써 한 해가 지나갔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부터, 누가, 왜 이루어질 것인가의 대해서는 구체적인 실마리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사람들이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이 있나 기대하며 찾고 있을 따름인지 아니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인지는 먼저 까치를 본 사람을 찾아서 물어봐야 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의 본질이란 참으로 기묘하고 변화무쌍한 것이기도 해서 인간의 연구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 천 년이 흘렀지만 그 신비를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본시‘사람’이란 살(生)+(암, 접사)의 변화로‘삶’의 어원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차피 삶에 대한 숙명적인 관련 속에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것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지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서 대개의 사람들이 의, 식, 주(衣食住)의 비중을 가지고 서로 견주어 보고 경쟁하면서 사는 맛을 돋우는 것이니 또한 인간사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란 제 멋대로 우위를 정하고 스스로 우월감에 젖어보거나 또는 자신을 비하시켜 위축감에 얽매이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온통 숫자 앞에서 꼼짝 못하는 습성으로 길러져 왔기 때문에 1등을 지향하며, 1번으로 해치워야 하며, 1위에 오르고 싶어 자신이 해당하는 숫자에 울고 웃고 때로는 즐겁고 서럽고 울적하기조차 했다.
비교란 존재하기 때문에 비교되는 존재의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길고 짧은 것은 짧은 것에 비해 길다는 것이고, 높고 낮은 것은 낮은 곳에서 바라볼 때 높은 것이며, 앞서고 뒤지는 것은 뒤에서 볼 때 앞에 가는 것이다.
도덕경의 장단상교(長短相較), 고하상경(高下相傾), 전후상수(前後相隨)는 그 의미를 약간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대치되므로 그렇게 인식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서 1등을 하는 것보다는 꼴등이 있어 1등을 하는 것이 보람된 일이기에 꼴등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홀로서 1등이란 무의미하며 서열을 정할 수 있는 수의 존재가 있어야 하므로 꼴등이나 2등이 없이는 등수를 가름할 필요성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잘 난사람은 못 난사람에 비해 잘 나 보이는 것이므로 못 난사람이 있어야 잘 나 보이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들이 많으므로 그 세를 과시하는 것이니 아랫사람이 없이는 허무한 일이므로 못난 사람이나 아랫사람이 없이는 존재의 의미가 없으므로 말짱 헛것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엄청 경쟁하는 것을 좋아한다. 스포츠는 물론이려니와 어디서나 반드시 성적순, 신간 순이 있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우열을 스스로 만들려고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속물이기 때문에 우열에 치중하고, 속물근성은 의식주에 대하여 그 가치를 찾으려 획득, 수확, 정벌, 장악으로 경쟁을 유발한다.
가치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효용성의 척도로써, 만족시킴으로 인한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고 정서에 근거를 둔 정의적 욕구대상으로 지향하는 목적 또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어디 그러한가. 다시 돌아가 볼라치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무엇을 먹을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어머니가 탯줄을 통해 공급해주므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신체 장부가 성장하는 것에 부담이 없기 때문에 심지어 호흡마저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끊어버리니까 살아야 되겠다는 본성으로 응아! 하는 일성(一聲)에 기도(氣道)를 열고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젖꼭지를 찾아 먹이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줄곧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모유, 분유, 이유식, 부모의 선택에 의해 먹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우량아 선발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젖먹이들이 겨뤄보는 행사가 있었다. 그 또한 1등으로 뽑힌 애가 뭘 알겠냐마는 괜스레 경쟁을 좋아하는 어른들의 얼토당토않은 즐거움일 따름일 뿐, 아이가 1등을 해보려고 열심히 먹은 것도 아니고 그저 입맛 당기는 대로 본능적으로 먹었을 따름이다.
또한 갓난아이는 무엇을 입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기저귀를 채우든 알몸으로 버려두든 부모가 하는 대로 그만이었다. 백일 때,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때때옷을 입은 것은 부모의 과시이지 아이가 주문한 것이 아니라서 설령 그 옷이 값비싼 것이라 해도 아이는 모르는 것이다.
집 또한 부모가 살고 있는 곳이므로 오두막이든 맨션이든 불편하지 않으면 잠자리의 공간에 대해서 별로 보채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침대를 들여놓고 거실을 멋들어지게 꾸미는 것은 어른들의 취향이지 아이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값비싼 카페트에 똥, 오줌을 갈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점점 자라면서 입맛이 발달하고 좋은 옷을 알게 되었다. 혀에 감치는 맛의 유혹에 부모에게 보채고, 옆집 사는 녀석이 유명 브랜드나 메이커 제품을 뽐내는 바람에 시샘이 나서 부모를 졸라보기도 했다. 그러한 욕망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강해지고, 어깨동무의 축에 끼이지 못할까봐 꽤는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어깨동무란 어깨 높이가 같아야 한다. 초등학생과 대학생은 어깨동무를 할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나 끼리끼리의 동무들 간에는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된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는 말은 항상 가까이 에서 견주고 비교해 보는 경쟁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에서 일체감을 갖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서로 닮은 데가 있거나 서로 다른 점이 있어야 유사성이나 상보성에 의해 친숙해지는 것이므로 자기들의 우열이 없는 동지(어깨동무)라는 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쟁이란 동년배에서 이루어지고 그 저변에는 반듯이 욕구를 수반하게 되어있다.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에서 생리적인 욕구와 심리적인 욕구로 나누어진다. 그것을 아브라함 머스로우는 욕구단계 설에 의하여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귀속, 애정의 욕구, 자존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 식, 주 역시 욕구를 일으키는 단계에서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욕구란 필요로 하는 것(목표)이 매우 중요해서 그 목표가 행동이 되는 것이며 이를 유인(誘因)이라 하는데 유인의 상황과 가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돌고래는 먹이를 얻어먹기 위해 재주를 부린다. 배가 고프니까 재주를 부리는 것이지 배가 부르면 재주를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련사는 배가 고플 때이거나 아니면 굶주리게 한 상태에서 훈련이나 조련을 한다. 이것이 조련사가 요구하는 행동을 했을 때에 먹이를 주는 오퍼런트 조건부여(Operant, Conditioning)의 훈련방법인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적극적, 자발적 행동을 하는 존재로서 스커너는 그 행동을 오퍼런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하나의 행동으로 많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예로 식사는 식욕을 충족시키면서도 가족의 행복(외식, 또는 식도락을 즐기는)이나 사교상 교제(우정돈독이나 사업상)를 하면서 스스로 과시하고 홍보하는 목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욕구적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저변의 생리적 욕구가 강한 기본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단순히 먹어야 산다는 것이어서 어려서는 먹는 것에 대한 의미가 단순화되어 있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달라진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욕구단계설에서 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인간은 먹는 것에 대단한 욕심이 있다. 대개의 동물은 동면을 위한 먹이 외에는 식량을 저장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몇 년간의 식량을 비축해 둔다. 아마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사람은 먹은 것으로 온갖 궁리를 해서 멋을 부리려 한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식품 관련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발달되어 있다. 영양식품학, 식품가공학 중에서도 여러 갈래로 세분화되어 전문적으로 동, 식물성 식품, 향신료, 조미료, 기호품, 편리식품 심지어 근래는 다이어트 식품까지 뻗어가고 있다.
조리에서도 예술을 가미해서 벼라 별 짓거리를 다한다. 지지고, 볶고, 삶고, 끓이고, 색깔을 맞추고, 미락(味樂)을 즐긴대나 어쩐대나 하면서 별 오두방정을 다 떨면서 비싼 값에 내놓고 처먹는 사람은 그럴듯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뽑아 보인다.
그리고는 칼로리를 소비해야 몸매를 유지 한다나 어쩐 다나 하면서 헬스클럽을 찾아 에어로빅인가 무언가로 비지땀을 흘리며 폴짝 폴짝 뛰는 꼴이 현대인들 사이에 작금의 실태인데 그러면서도 비만, 당뇨병, 고혈압 환자들이 왜 그렇게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다.
또한 옷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욕심이 많다.
의복이란 기껏해야 신체의 구간부(軀幹部)에 착용하는 것으로 기후 변화에 한서를 조절하거나 외부로부터의 장애를 막아 신체를 보호하는 실용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한 나뭇잎으로부터 시작해서 동물의 가죽, 모피, 식물의 섬유 등으로 또는 피복계의 모자, 장갑, 신발 등을 비롯해서 온갖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호화 찬란한 발달을 이룩해 놓았다.
또 그 분야 역시 많은 방면으로 번져서 의류학, 섬유의상학, 의상디자인, 등등이 눈부시게 발전이 되어 요즈음 패숀 계의 저명인사인 앙드레 킴의 옷이면 누구나 껌뻑 죽는다. 여북하면 얼마 전에는 고관대작 부인들의 옷 로비사건으로 청문회가 떠들썩하고 나라가 온통 술렁거리기도 했다.
학계가 말하는 의복의 착용 목적이란 인체의 생리 위생상 신체의 보호나 활동, 휴양 등의 목적과 사회생활 장식이나 의례, 표지, 유별의 목적이라고 정의해 놓고 있는데 요즈음 사람들의 작태는 욕심이 지나쳐서 좀 심한 것 같다. 팬티 한 장에 몇 백만 원짜리가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허긴 다이아몬드도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눈을 휘 번득 거리는 것은 인간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동물에게는 의복이 따로 없다. 추우면 두텁게 하고 더우면 벗는 털이 겉치레의 전부인 것이다.
다만 자연에 맞추어 보호색을 띠거나 자기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신체의 색깔이나 형태를 변화시킬 따름이다. 적을 의식하고 살아남기 위한 오로지 생존의 수단일 따름이다. 그러나 유달리 인간만이 겉치레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자랑을 일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거주문제)은 어떠한가, 역시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대상물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원초적 형식이란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은신처로 동굴이나 바위틈을 이용한 토막식수혈주거(土幕式竪穴住居) 형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서 수확물의 저장과 외적과 맹수의 침범에 대비하는 경계형태로 농경사회로 넘어 오면서 수상주거(手相住居), 항상주거(杭上住居), 고상주거(高上住居), 수상주거(水上住居)의 방어적 형식으로 바뀌어 오면서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축조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건축문화가 화려하게 급진전해 온 것이다.
현대의 주택개념이란 인간을 비, 바람이나 추위, 더위와 같은 자연적 피해와 도난, 파괴와 같은 사회적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건물로 인간의 생리적 욕구인 식사, 배설, 수면 등을 해결하고 재창조를 위한 휴식과 문화생활을 담는 공간을 건축적으로 해결한 것이라 한다.
물론 이 사생활에 대한 욕구는 적절한 사회적 관계나 공동적 취락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또한 호화찬란한 저택으로 사람들은 으스대고 거드럭거리면서 왜 눈꼴사나운 꼴불견을 연출하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보석으로 벽 처리를 하고 바닥에 금으로 깔았대서 제 멋이라 하겠지만 그게 어디 주거 목적이란 말인가, 아마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졸부의 발악이나 거드름인데 또 그것을 보고 입을 벌려 혀를 내두르면서 부러워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니 인간의 욕구는 차마 말릴 길이 없는 모양이다.
요즈음 사람들의 욕구는 사교적 치레를 중요시해서 몸을 가리기 위해 입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을 입고, 주위 환경의 조건에 따라 생리적 상태를 유지하여 안정된 휴식을 위한 주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 세 식구가 70여 평이나 되는 아파트를 가지고 객을 불러들여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집을 장만하고, 또한 우아하고 품위 있게 미식과 식도락을 즐기기 위해서 먹는 것 같다.
딴에 제 잘난 멋이 없으면 살맛이야 나겠느냐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삶의 본질을 왜곡하여 욕망의 포로가 되어 덤벙대다가 시행착오를 일으켜 거덜 내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나는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다.
욕망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사악한 것임을 모르고 과욕으로 인하여 삶을 망가트리는 일이 허다하고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이란 어리석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욕구단계설의 각 단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경쟁을 벌리고 그 과정과 결과에 의해서 빚어지는 비극을 우리는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동물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지만 인간만이 과거에 의해 미래를 지레 짐작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한다. 굶주려 본 사람이 고급 음식을 찾고, 괄시를 받아 본 사람이 좋은 옷과 호화주택의 사치와 허영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의 마무리가 되어갈 즈음이 되면 노인(老人)들은 말을 한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입맛을 모르며, 멋있는 옷도 폼 새가 나지 않으며, 호화스런 주택보다는 등이 따뜻한 곳이 좋다고 말이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대지를 요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웠으니 발가벗은들 부끄러움을 모르니 한 평생이 이만하면 어떠냐고 한다.
자아실현의 최고봉인 욕망이 십분의 일이라도 성취되었다면 지난날에 견주고, 다투고, 근심 걱정을 자초하여 많은 사람에게 원한을 사면서까지 억척스럽게 살아온 부질없는 삶의 후회가 덜 하겠지만 그나마 이도 저도 아니면 퇴색된 자화상에서 허망함을 보게 된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무욕무적(無慾無敵), 무지무우(無知無憂), 부쟁불패(不爭不敗)로 간단하게 설파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게 되는가. 아마 평생에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고, 굶주리지 않았던 곳은 어머니의 뱃속이었으니 그 곳이 바로 천당이요, 극락으로 이제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가자! 가자! 차라리 돌아가자! 외치면서 말이다.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어본다면 여러 형태로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정을 위해서 그러니까 마누라와 자식들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든가 좀 더 거창하게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등등의 많은 답들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정녕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며 또한 이루어질지 말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단순한 꿈이고, 이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진실로 살다보면 살게 되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살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이 될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사는 동안만큼은 무엇을 하고 싶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산다는 것에 열정을 쏟아보고 싶기도 하고, 또는 유감없이 후회 없는 삶을 통해 보람을 얻고자 할 것이다.
그런 희망과 의욕과 정열로 삶을 이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가치와 그리고 하는 일에 대한 보람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살고자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나마도 없으면 사는 맛이 없어서 죽을 맛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는 희망을 말이다. 처음 태어나자마자 인간에게 준 것은 희망의 불쏘시게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살려나가기 위해 바람과 보람으로 열심히 풀무질을 하면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인간은 살맛과 죽을 맛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제공을 받고 우러나게 되어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더러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사랑이라는 연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엄청난 실망과 허무함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 때문에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은 희망과 사랑을 위해 열정과 의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은 반드시 변해가기 때문에 섣불리 무엇 때문에 어떻게 되기 위해 살아간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 지식을 얻기 위함이나 지혜를 얻기 위함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정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근래에 들어서 청소년이나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생각과 목표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이 여간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분명 그들은 학교나 교육기관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의 부흥과 발전에 도모하고 인류평화를 위하여 봉사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정신으로 큰일을 해낼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과 학습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는 것이며 실질적으로 앙케이트 조사에 의하면 대학생들의 지식을 얻기 위한 목적은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며, 소위 출세를 위해서라고 했다. 말하자면 부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한 것인데 그것의 원래 목적이란 식구(마누라와 자식들)를 위하여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라고 젊은이답게 솔직한 대답을 해준 것이다. 더구나 요즘 젊은 여성들은 나쁜 남자들을 더욱 선호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개의 사람들은 아는 것으로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을 삼기 위한 것이란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우고 공부해서 명성을 얻고, 그리고 그 대가를 찾아서 자신의 이득으로 삼아야 하며, 살아가는 수단과 방법으로 써먹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주위를 살펴보면 잘 배우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는 행세를 하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 적은 대가라도 만족하며 열정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또한 자기 직업을 이용해서 헌신과 봉사의 정신으로 가엾은 사람들이나 절실한 사람들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종사하면서 나타내지 않는 훌륭한 사람도 아주 드물게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반면에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배운 것을 이용해서 약자들의 약점을 잡아 못된 짓을 하거나 오히려 궁지에 몰아넣어 잇속을 챙기는 비열한 짓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많이 배운 사람은 특히 그러한 허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마수에 걸리지 않으려고 배우기도 했던 것이다.
치부와 권력을 노리기 위한 야비한 행동은 실로 가증스럽지만 못 배운 사람들은 그 덫에 잘 걸려들기 때문이며 모르는 사람들의 비극이 곧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못 배우고 무식한 민초들이 당하는 서러움이고, 그들은 자기네끼리 또한 경쟁을 벌리면서 잘사는 것이 능력이 있다고 평가를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더욱 많이 연구를 해가면서 못된 짓을 일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못 배우고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은 남을 속일 수가 없으므로 분명한 것이란 이 사회의 아는 사람들이나 그리고 배운 사람이 남들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운 것으로 영리하게 남을 호도하거나 현혹시키기도 하고, 교활하게 못 배운 사람들을 속이며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돈 잘 버는 법조인, 부자가 된 경찰관, 그리고 호화생활을 하는 고위공무원, 그리고 흥청망청 돈 잘 쓰는 의사, 등등이 진실로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고서야 그리 되었겠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빛 좋은 개살구도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 번 사람들에게 속아봤지만 가장 크게 당한 사건을 들라면 두 가지의 예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며, 두 번째는 늙어서 친한 친구에게 감쪽같이 사기를 당한 일이었다. 처음 이야기는 이미 말한 사실이 있지만 두 번째 이야기를 덮어두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말하자면 위에서 말한 소위 식자이며 사회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학을 나왔으며 의학박사의 학위를 받아서 사회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소위 말하자면 출세를 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당뇨병으로 인해 치아가 약해저서 항상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곳의 치과를 드나들었는데 마침 동창생인 유 모 씨라는 사람이 석관동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하면서 친구들에게는 파격적인 할인으로 친절하게 치료를 잘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동창회의 석상에서 만났다. 그는 즉석에서 자기 병원으로 찾아오면 선처해주겠노라고 쾌히 승낙해주었다.
그러나 석관동까지 용인에서 가고자 한다면 버스와 지하철을 그 당시에는 4번씩이나 갈아타야 되므로 상당한 시간(왕복 4시간이상)이 소요되었다.
나는 그 때부터 그 친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거의 일주일에 2번 정도를 내원하면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여 무려 3년 동안을 그 짓을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며 가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좀 고생을 하면 낙을 찾을 거라는 그 친구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는데 갈수록 별로 신통치 않은 기분이 들기만 했다.
생 이빨을 빼기도 하고 틀니를 하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고통은 갈수록 더해만 가는 것 같았다. 인플란트를 해야 한다고 해서 알아서 해달라고만 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그 방면에 지식이 없는 고로 박사께서 알아서 해주기를 처분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3년간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행여나 혹시나 하고 기대한 것이 비용 또한 무려 600만 원이나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갑자기 고통이 심해서 동네 치과를 들렸다가 원장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나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말하자면 유 모 치과의 친구 말이 모두 거짓이었고, 지금까지 한 치료는 모두 무효화라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말하자면 인플란트를 2개로 견적에 의해 청구금액을 나는 지불했는데 사실을 1개로 되어있었고, 모든 치료비가 얼토당토않게 청구되어 나는 비싼 값을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아 내가 그를 당할 재주는 없을 것 같았다. 이미 그는 동창회에서도 회장직을 맡아 많은 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풀기도 했으며 기부금도 꽤나 많이 내놓은 처지이므로 내가 그와 싸워봤자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동창회지에 어떤 교사출신의 친구가 그를 지칭하여 돈을 펑펑 쓰는 사람으로서 쓰는 만큼 거둔다는 것의 그의 지론이라 했다. 예로 노래방에 가서 돈을 아무리 써도 주인을 꼬들려 한 번이라도 자기 치과로 모시게 되면 그 본전을 충분히 탕감하고도 남는 돈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는 유 박사 라는 사람을 말미에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큰돈을 펑펑 써대면서 잔돈푼에도 인색하기가 굶주린 초가을의 모기와 같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나에게서 받은 돈으로 술집에 가서 친구들에게 후한 인심을 쓴 것이며, 나는 그에게 돈을 대주는 물주가 되어준 것에 불과했다.
그 후로는 나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서 다른 치과에서 새롭게 치료를 받았고 유 치과에서 받은 것은 원천 무효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친구는 박사학위를 받아 치과를 운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앎을 이용하여 고통을 받는 약자들을 우롱하고 또는 그들의 약점을 노려 잇속을 챙겼던 것이다. 그것도 친구를 상대로 말이다. 그의 편법운영은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 현금지불을 하는 사람에게는 에누리를 해주고 영수증처리를 하지 않는 수법을 쓰고 있어 국가에 대해서도 떳떳치 못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태는 사실상 알게 모르게 성행하고 있는데 특히 엘리트층이나 식자들 간에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현실의 암울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편법이나 위법을 자행하는 자들이나 남을 등쳐먹는 요령이 있는 사람들을 능력이 있다고 칭송을 하는 세상이니 허긴 세상이 잘 못 돌아가는 것임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심에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한다면 자비는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두고 끊임없이 덕을 쌓아 정성을 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악인에게는 애당초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개 자비는 긍휼에서 오는 것이므로 긍휼 외에 오는 자비는 잔학의 일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의 것을 겁탈하여 남을 도왔다는 의인이나 깡패 두목의 행위는 의적처럼 훌륭해 보여도 그것은 결코 자비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측은한 마음에 남을 동정하기 위해 나쁜 짓으로 물질을 취득했다면 빼앗긴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으므로 그는 정당하지 못한 것이며 합당치 않으므로 죄악이라고 봐야 될 것이다.
또한 예로 부자들이 보석전시회를 열어 수익금의 일부를 양노원이나 고아원에 기부한다고 해서 그들을 자비롭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들을 오히려 가증스럽기 때문에 잔악성이 있어 감사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비의 마음이란 인자함을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므로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그를 위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자칫하면 더욱 큰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를 펼침에 있어 영리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선량하고 진심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한 진정한 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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